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 성서초등학교 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 (문단 편집) == 경과 == 사건 초기 경찰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로 인한 [[앵벌이]]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엉뚱한 수사 방향을 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5명 아이들이 모두 집안 사정이 부유하진 않았어도 별다른 문제 없이 화목했기 때문에 가출할 만한 사유가 없었으며 더구나 실종된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이던 우철원 군이 13세, 나머지는 거의 갓 10대에 들어섰고 특히 막내인 김종식 군은 9살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 나잇대의 아이들이 가출이란 엄청난 일을 벌이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늦추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남은 유력한 가능성은 유괴 아니면 가출인데 딱히 유괴범으로부터 오는 협박 전화도 없었을 뿐더러 앵벌이 조직이 굳이 외딴 마을에 찾아와 아이들을 깡그리 납치해갈 가능성은 낮았다. 번잡한 도시에서야 아이 1명이 갑자기 사라져도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이 얼마 살지 않던 시골 마을[* 당시 대구시는 직할시였지만 서구 상리동은 대구에서 개발이 거의 되지 않은 미개발 지역이었다.]에서는 순식간에 마을 전체가 난리가 나기 때문이다. 당시 시골에는 '골목대장'의 말을 부모님의 말보다 더 듣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초등학교 6학년 '형님'의 말이라면 아이들이 이끌려 갈 수도 있기에 호기심에 타지에 놀러갔다가 범죄에 연루된 게 아니냐는 추측에 의거해 초기 수사 방향이 정해졌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정체불명 살인마가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추측에는 누구도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사건이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5월 5일 [[노태우|노태우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한국군|군]]과 [[경찰]]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초반에는 수색 인력이 부족해 와룡산 서남쪽과 연못만 수색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가 7월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산하에 수사본부가 차려져 총 25개조에 1조당 25명으로 구성됐고 이곡동 성서파출소 옆 건물에 둥지를 틀었다. 10월 24일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을 겸하면서 대구지역 군경 수천명이 탐침봉까지 들고 와룡산 전체를 뒤졌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1996년 해체 전까지 5년 간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산악수색 48차와 일제 검문검색 43차 외에 복지시설 및 종교단체 1천여개소, 가정집 11,000세대를 각각 수색했고 성서초 졸업생 1,800명과 공단 노동자 19,000여명에게도 수소문해 제보만 570여건이나 됐지만 전부 허사였다. 경북 구미에선 목격 제보가 들어왔고 부산에서 앵벌이로 커피를 팔거나 새우잡이배에 납치됐다는 등의 제보도 나왔으나 찾지 못했으며 사건이 워낙 유명해진 탓에 허위제보도 잇따랐는데 "아이들은 내가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 OO로 찾아와라" 같은 [[장난전화]]가 빗발쳤고 자기가 실종 어린이들 중 한 명이라는 장난전화를 하면서 부모를 놀리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신이상 증세를 앓던 어린이가 "내가 개구리 소년"이라고 주장하고 떼를 쓰며 난동을 부리거나 심지어 [[막장 부모|부모가 자녀에게 장난전화를 시키기도 하는 등]] 부모와 조사하던 경찰들을 허탈하게 하여 수사에 혼선이 생겼다. 다행히 국민들의 어떻게든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덕분에 각 기업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찾기 위해 홍보에 진력했다. 그래서 전화카드나 담배갑은 물론 당시 즐겨 보던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에는 어김없이 개구리 소년과 관련된 광고가 삽입되었고 우유나 과자 포장에도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가 인쇄되었다. 특히 [[포항제철]]은 대구지방경찰청에 현상금 1천만원을 기탁해 가며 전단 80,000장을 임직원과 고객들에게 뿌렸고 [[한진그룹]]도 대한항공과 한진고속 승객 및 임직원, 고객들을 상대로 100만장을 뿌렸다. [[LG생활건강|럭키]]도 수퍼타이 등 전 제품에 실종자들의 사진을 붙이고 수퍼타이 CF '미아찾기 캠페인'을 통해 홍보했으며 [[국민신용카드]]도 1991년 11~12월까지 대금청구명세서를 담을 우편봉투에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를 실었다. [[한국담배인삼공사]]는 미아찾기 캠페인 참여사로서 88담배에 아이들 사진을 삽입했고 부산택시조합도 1992년 달력에 사진을 실었다. 그 외에 [[제일제당]], [[기아자동차]](現 기아), [[남양산업]], 남양알로에(現 [[http://kr.univera.com:7778/newHome/index.html;jsessionid=7f00000130d82cc8eab6c763480c93d7ceb97c691126.e38Mc3uSbNyPby0PaNmLbN4Oa350|유니베라]]. 1976년에 설립된 건강기능식품 및 화장품 제조회사로 대한민국 최초로 [[알로에]]를 시험재배한 회사), [[대도제약]](1962년 설립. 혈전 용해 치료제 '용심'과 어린이 영양제 '아토실'로 유명했다. 1997년 [[삼성정밀화학]]에 인수) 등지도 사보에 사진 및 명단을 실었다.([[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1991112300401|참고]]) 또 개구리 소년을 주제로 한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1992년 11월 개봉)이나 노래도 제작되었고 [[MBC]] 《[[https://www.youtube.com/watch?v=VpIGFqIoPKY|생방송 여론광장]]》- '얘들아, 어디있니?' 편(1991년 5월 4일 방영분)을 비롯해 [[SBS]] 《[[그것이 알고싶다]]》(1993년 3월 21일 방영분), [[KBS1]]의 《[[공개수배 사건 25시|사건 25시]]》(1993년 6월 26일 방영분) 등에서 심층 분석하기도 했다. 심지어 대교출판에서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 동화 《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이기창 저)》를 출간했다. 한편으로는 1970년대에 남파 간첩을 훈련시키는 교관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북한]] 공작원이 남한 고교생 등을 납치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 공작원의 납치설도 떠돌았다.[* 1990년대에도 가끔 간첩이 출몰하긴 했으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심지어 허무맹랑한 [[UFO]] 납치설까지도 제기되었다. [* UFO 납치설은 지금 보면 뜬금없지만 이 사건 즈음은 "안녕하세요 지구어린이"란 괴작 서적이 아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던 시기였다. 서적 판매뿐만 아니라 UFO가 녹음된 소리라며 비싼 정보이용료가 청구되는 ARS 전화를 유도하여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갈취했을 정도였고 이 서적과 전화에 진지하게 속아넘어간 어린이들 때문에 혹시 개구리 소년들도 UFO에 납치된 게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아이들은 사실은 인류가 아니라 어느 별의 [[외계인]]이라서 외계인이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이라는 개소리까지 돌았을 정도. 심지어 "[[나병]]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경찰이 나환자촌까지 가서 수색하려다 한센인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심리학자와 심령술사, 역술인들 역시 이 대열에 동참하면서 경주 왕릉 매장설, 김종식 군 자택 매장설, 고속도로 교각 매장설 등 온갖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찾지 못했고 결국 영구 미제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돌며 자식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 부모들의 눈물겨운 노력도 허사가 되어 갔다. 1993년 1월에 실종자 부모들이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를 냈지만 9월에는 직접 수색을 포기했다. 1995년에 경찰은 컴퓨터로 만들어진 아이들이 자란 후의 얼굴을 예상한 가상 몽타주를 실은 전단을 2만여장이나 뿌렸고 1996년에는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관련 업무를 달서경찰서 수사전담반으로 넘김에 따라 경찰서장이 본부장을 맡고 수사인력도 총 10명으로 줄었다. 1997년 8월에는 40대 여성이 법정에서 자신이 개구리 소년을 유인 후 암매장했다고 밝혔지만 허위 진술로 밝혀졌다. 사건 발생 약 10년 후인 2001년 7월에 전남 신안군 지도면 증도의 한 염전에서도 제보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급파됐으나 허위로 판명났고 그해 10월 22일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슬픔을 술로 달래며 살던 게 화근이 되어 [[간암]]으로 사망해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건 이후 다른 부모들과 함께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던 모습과 1993년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 인터뷰에 응했던 모습을 보면 본래 그는 매우 건장한 체격이었다. 젊었을 때 [[유도]]를 해서 매우 건강했다고. 그런 그가 간암에 걸려 죽을 정도로 폭음을 했으니 아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게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알 수 있다. 유골 발굴 전인 2002년 9월 한 남성이 "아이들이 묻힌 곳을 알고 있다"라며 거짓 제보를 했는데 하필 유골 발견 '''전날'''에 들어온 제보라 제대로 엮였다. 경찰은 이 남성의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수배했다. 이 몽타주가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의 범인의 몽타주로 알려져 돌아다니는데 범인의 몽타주가 아니다. 결국 이 남성은 경찰서에 자수해서 체포되었다. 이때 "[[노태우 정부]]가 [[강경대]]와 [[김기설]] 사건 등 당시의 어수선한 시국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죽여 암매장한 공작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등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고 조사해 보니 10여년 전 권투해서 돈을 벌겠다며 집을 나갔다가 머리를 다쳐 정신이상 상태였으며 [[서울역]]과 [[명동성당]] 등지를 전전하던 노숙자였다. ([[http://m.journalist.or.kr/m/m_article.html?no=4764|기자협회보]], [[https://m.yna.co.kr/view/AKR20020930005400004|연합뉴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